어린 시절과 음악적 깨달음
피터 천(Peter Chen, 본명: 천샤오인)은 1943년 8월 12일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가는 광둥성 차오양입니다. 1947년 세 살 때 부모님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하여 타이베이의 군인 부양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피터 천은 서양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엘비스, 비틀즈, 밥 딜런과 같은 록 스타들의 음악에 심취했습니다. 대만 국립 정궁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직접 일렉트릭 기타를 제작하고 데이비드 타오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타오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카바레에서 공연하며 대만 최초의 팝 가수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카바레는 종종 외국인 관객을 맞이했기에, 그는 중국과 서양의 요소를 결합한 예명인 "피터 천"을 사용했는데,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음악 경력의 정점
1971년, 피터 첸은 음악가 웽칭시(Weng Qingxi)의 지도 아래 첫 솔로 앨범 "로즈 안나(Rose Anna)"를 발표하며 정식 음악계에 진출했습니다. 그의 음악 스타일은 대담하고 혁신적이었으며, 록, R&B, 랩 등 서양적 요소를 만다린 팝 음악에 접목시켜 당시 대만 음악계의 달콤한 사랑 노래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렸습니다. 1972년, 그의 노래 "눈물 흘리며 웃다(Smile with Tears)"는 위톈(Yu Tian)의 명곡이 되어 널리 불렸습니다. 1979년, 그의 앨범 "또 하나의 사랑 노래(Also a Love Song)"에는 "알리바바(Alibaba)"가 수록되어 유명해졌지만, 이후 이 노래는 피터 첸의 원작이 아닌 독일 음악가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980년대는 피터 천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는 페이위칭의 "일절매(一節梅)", 류원정의 "지연(智淵)", 펑페이페이의 "부드러움(柔婦)" 등 수많은 가수들의 히트곡을 작곡했습니다. 한 곡만으로도 가수를 유명하게 만들 수 있었고, 그는 "대만 대중음악의 대부"로 칭송받았습니다. 그가 작곡한 곡은 수백 곡에 달할 정도로 놀라웠고, 한 달 만에 40곡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라디오 3대 차트는 그의 작품으로 가득 차곤 했습니다. 하지만 "일절매"의 작곡 방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피터 천은 방송에서 자신이 직접 작곡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작곡가는 천신의(陈心義, 필명 천이)였습니다.
또한, 피터 첸은 1980년대 후반에 대만공연예술연합을 설립하여 예술가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남성 예술가의 공연 수수료를 1,000대만달러에서 10,000대만달러로 인상하여 업계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고국으로의 귀환과 음악의 변화
1987년, 대만은 본토 친척 방문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피터 천은 40년 만에 일본을 거쳐 고향 청두로 돌아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형을 재회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는 이 귀환을 "향수보다 더 소심한" 일이라고 표현하며, 마치 어머니의 맛을 다시 찾은 듯 추억 속 단단면을 먹었습니다. 1988년, 그는 그룹을 이끌고 본토에서 20회의 "친척 방문 음악회"를 열었고, 대만 음악가로서는 최초로 본토에서 공연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1991년 베이징에 정착한 그는 점차 고시(古詩)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는 데 주력하며, 현대 음악으로 전통 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자 노력했습니다.
고시 음악 시장에 대한 반응이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터 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18년, 그는 CCTV "고전 찬송"에서 신치지의 "청위안·원시"를 록 스타일로 선보이며 800년 전의 대담한 가사와 현대 음악의 만남을 통해 청중을 매료시키고 젊은 청중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습니다. 같은 해 "중국의 목소리 2018"에 참여하여 "나를 기억해"를 불렀습니다. 비록 멘토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지만, 그의 음악적 열정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2019년, 그는 CCTV 플래시몹 행사에서 진심 어린 "나와 나의 조국"을 불러 "움직이는 중국" 후보에 올랐습니다.
음악에 대한 후반의 삶과 끈기
말년에 피터 천은 청두로 돌아와 고향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고향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아 "천부천수(天府泉水液活)"와 같은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2023년에는 CCTV 춘절 갈라 행사에 참여하여 음악을 통해 끊임없이 감정을 전달했습니다. 또한 광저우에 아내 바두와 함께 운영하는 개인 주방 "77그램(77 Grams)"을 열었습니다. 그는 가끔 손님들을 위해 연주와 노래를 하며 음악과 삶의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었습니다. 피터 천은 음악과 요리가 "두 번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며, 마치 영화 "알리바바"의 주인공처럼 행복해했습니다.
기억과 영향
피터 첸의 음악 경력은 반세기가 넘습니다. 그는 록과 혁신으로 대만 대중음악의 전통적인 틀을 뒤엎고 중국 음악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One Cut Plum", "Late", "Alibaba"와 같은 그의 작품은 시대를 풍미한 명곡일 뿐만 아니라 대만 해협 양안 음악 팬들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말년에는 불안증에 시달렸지만, 그는 자연과 음악으로 치유를 선택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노래를 통해 조국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음악적 전설이 아니라, 뿌리를 찾아 헤매는 방랑자의 감동적인 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피터 첸은 기타와 노래로 자신만의 답을 만들었다. "저를 기억하세요. 저는 가수입니다. 인생은 계속되고, 음악은 멈추지 않습니다."